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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9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너


그 사람을 안다면 내 말좀 전해 주세요
사랑밖에 몰라서 울던 그 사람에게
아픔을 안다면 내 말좀 전해 주세요
가슴을 베어 내고 울고 있다고

가슴에 녹이 쓸어 아픔인 줄 몰랐죠
눈물에 무뎌져서 사랑을 베어 내고
너무 늦어서 늦게 알아서
어떤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은 너라는 말

논바닥이 마르고 벼들이 타듯이
매 마른 내 사랑은 소리 없이 타죽어
영원히 해가 뜨지 않을것 같은 기분
짙은 안개 속에서 새벽만 계속 되는
내 사랑은 썩어도 저 숲은 푸르네
오늘 따라 서글프게 태양은 빛나네
날개 있다고 모두 다 새는 아냐
내 두날개는 찢겨져 길 거리도 못걸어

네가 지나 가면 물결이 일고
바람이 지나면 나뭇잎이 흔들려
그대에 제발 내 옆을 지나가죠
다시 내 사랑을 심장을 흔들어줘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
그녀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있을까
이별이 싫은데 아픔이 싫은데
모든 낮과 밤을 그대와 함꼐 살고 싶은데

가슴에 녹이 쓸어 아픔인 줄 몰랐죠
눈물에 무뎌져서 사랑을 베어내고
너무 늦어서 늦게 알아서
어떤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은 너라는 말

애당초 사랑이란 사치 였을까
내리는 비조차 나를 보며 비웃어
비오는 날에 새들은 어디 있을까
나처럼 구석에 숨어서 울고 있을까
난 너의 사랑을 주워 먹고 사는 새
허나 그대 없이 이미 시간은 멈춘채
멍하니 털이나 새면서 니 얼굴을 그려
지루하게 어두운 이불속에서 기어다녀

가슴에 녹이 쓸어 아픔인줄 몰랐죠
눈물에 무뎌져서 사랑을 베어내고
너무 늦어서 늦게 알아서
어떤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은 너라는 걸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
바로 이 순간을 느끼는 너와 나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
바로 그대야 사랑을 말해줘

너와 함께 있을때
너와 길을 걸을때
이 모든게 난 너무 행복해

가슴에 녹이 쓸어 사랑을 베어내고
아픔인 줄 몰라서 눈물인 줄 몰라서
그대 떠나간 내 빈가슴에 사랑을 심어줘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
사랑보다 아름다운 말
바로 너...

사무라이가 활복할 때 배를 가른이유





무사의 할복은 헤이안시대 이후 시작됐다고 전해지는데 봉건시대의 무사는 정신이 머무르는 곳을 배라고 여겨 무사로서의 책임을 지기위해서 죽을 때 할복했던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사가 죽을 때 할복하고 죽는 것으로 만 알고 있는데 칼로 자기 배를 그어 죽는 것이 아니고 할복의 실패를 막고 참혹한 고통을 빨리 없애기 위해 스스로 배를 찌르려할 때 뒤에서 목을 쳐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

4명이 있으면 2명이 남은 2명의 목을치고 살아남은 2명중 한명이 다른 목을 치고, 최후에 남은자는 혼자서 할복해 죽어야 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서 남은 사람이 더 무사적인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말도 있다.

민도르




다시 가고 싶다...

한국은 겨울이라서 너무 추워...

따뜻한 남쪽으로 가고 싶구나

기억술 ??


1578년 이전에 이미 유럽에서는 이런 기억술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1530년대에 마술과 과학적 연금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라는 [기술과 학문의 공허와 불확실함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기억술이 날조한 '기괴한 이미지'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연스런 기억력이 둔화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보의 무수한 조각들을 무리하게 머리에 담아 넣으려는 시도는 종종 "풍부하고 확실한 기억보다는 광기와 광란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아그리파는 이처럼 기억술로 지식을 과시하는 행태는 일종의 유아적 노출증이라고 생각했다. 1569년에 나온 그의 작품의 영역본에서는 이런 협오감이 더욱 심해진다. "독서에서 얻은 지식을 맣이 보는 앞에서 과시하는 형태는 오만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마치 상인이 자기 집에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물건을 늘어놓고 팔고 있는 것과 같다." 에라스무스나 멜한히톤 같은 종교사 상가들은 이런 기억술을 수도승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던 고대로 돌아가려 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기억술의 실용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역시 1530년대 인물인 라블레는 기억술을 조롱하고 신랄하게 비난하여 기억술에 대한 믿음을 깍아 내렸다. 그는 가르강튀아가 가정교사인 올로페르네한테서 당시에 가장 난해한 문법책을 기억하는 법을 배우고, 아울러 방브레에즈.스칼리와.클랍트라 같은 학자들의 시시콜콜한 학문적 주석들을 남김없이 소화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결과는 심각했다. 확실히 가르강튀아는 배운 책을 "뒤에서부터 암송할" 경지에까지 오르고, "오븐에서 구워낸 사람처럼 지식은 불어났지만", 막상 자신의 머로리 생각해서 대답해야 할 때면 "죽은 당나귀에서 방귀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가르강튀아의 입에서는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16세기 말엽 프랜시스 베이컨은 데이터를 조직하고 분석하는 자연적인 기억력에 매료되기는 했지만 인위적인 기억술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비판을 가했다. 그는 기억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묘기가 얼핏보기에는 인상적이라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놀라운 과시'라고 불렀다. 하지만 베이컨은 기억술이 근본적으로 '쓸모없는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수많은 이름이나 단어를 한번 듣고 외우는 것을 공중제비, 줄타기, 광대의 속임수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전자는 머리로 하는 것이고, 후자는 몸으로 하는 것일 뿐 어느것이나 진기한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Jonathan D. Spence The Memory Palace of Matteo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조너선 D. 스펜스, 주원준 옮기


마테오 리치 연표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태어남
1561년                  마체라타의 에수회 학교에 입학함.
1568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감.
1571년 8월 15일 예수회의 수련수사로서 로마의 성안드레아 신학원에 입학함.
1572년-1573년     피렌체의 예수회 대학에서 수학함.
1577년 여름         포르투갈 코임브라에 감.포르투갈어를 배움.
1578년 3월           포르투갈 국와 세바스티앙을 알현함.
             3월 24일 성 루이지호를 타고 리스본을 떠남.
             9월 13일 고아에 도착. 신학을 배우고, 라팅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침.
1580년                 코친에 거주. 7월말 사제로 서품을 받음.
1581년                 고아로 돌아옴.
1582년 4월 26일 고아를 떠남.
             6월           말라카에 도착.
             8월 7일   마카오에 도착.
1583년 9월 10일 미켈레 루제리와 중국의 자오칭에 거처를 마련함.
1584년 10월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의 해적판이 자오칭에서 인쇄됨.
1589년 8월 3일  중국 관리의 미움을 사 자오칭에서 추방됨.
             8월 26일 사오저우에 거처를 마련함.
1591년 12월        사서의 번역 초고를 집필하기 시작함.
1592년 7월          사오저우의 사제관이 공격을 당하고, 리치는 다리를 다침.
1594년 11월        예수회원의 복장을 승복에서 유학자의 옷으로 바꿈.
1595년 4월 18일 사오저우를 떠나 난징으로 감.
             5월 중순 배가 난파되어 동행한 바라디스가 익사함.
             6월 28일  난창에 거처를 마련함.
             11월         교우론을 씀.
1596년 봄           기법 초고를 씀.
1579년 8월          중국 전교단의 책임자로 임명됨.
1598년 9월 7일
      ~11월 5일     처음으로 베이징에 가지만, 거주허가를 받지못함.
1599년 2월 6일  난징에 거처를 마련함.
1600년 11월        환관 마탕에게 십자고상을 압수당함.
1601년 1월 24일 다시 베이징에 들어감.
             2월           중국 황제를 위해 서금곡의팔장을 지음.
             5월 28일  베이징 거주허가를 받음.
1602년 8월           세계지도 개정판을 출판함.
1603년 가을-겨울 천주실의 를 출판함.
1604년 8월 중순   다국어 대조 성서인 플랑탱 성서가 베이징에 도착함.
1606년 1월           지필묵 제작자인 청다웨에게 그림 4장과 해설문을 넘겨줌.
1607년 5월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의 전반부 6권을 번역하여 출판함.
1608년 1월~2월  가인십편 을 출판함.
            가을~겨울 중국 그리스도쿄 전교사 를 집필하기 시작함.
1609년 9월 8일  베이징에서 최초로 성모회가 결성됨.
1610년 5월 11일 베이징에서 사망함.

 1596년,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에게 기억의 궁전 짓는 법을 가르쳤다. 궁전의 규모는 기억해 두고 싶다고 생각하는 대상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싶다면 크고 작은 다양한 건물이 수백 개나 달린 대궁전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리치는 비록 단번에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지을 수는 없다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건물의 수는 많을수록 좋다"고 말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담한 궁전을 지을 수도 있고, 사원이나 관청, 공공 숙소나 상인회의소 같은 조금 수수한 건물을 지을 수도 있다. 좀더 작은 규모에서 시작하고 싶다면 연회실이나 별채, 작업실 따위를 세울 수도 있다. 만약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원한다면 별채의 한쪽 구석이나 사원의 제단을 이용해도 좋고, 옷장이나 소파 같은 흔한 기구라도 무방하다.
 리치는 이 기억술의 요점을 설명할 때 이런 궁전이나 별채나 소파는 머릿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상상의 산물이지, 말 그대로 '실제'물질로 지은 견고한 물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리치는 주로 다음 세가지 가운데 하나를, 이런 기억을 설치할 장소로 삼으라고 제안한다. 첫째, 현실에서 끌어낸 장소. 곧 한번이라도 가 본적이 있는 건물이나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어서 자신의 기억 속에서 되살려 낼 수 있는 물체 등에서 취한 장소이다. 둘째, 완전한 가공의 장소. 이것은 적당한 형태와 크기로 떠올린 상상력의 산물이다. 셋째, 현실과 가공이 반반씩 섞인 장소. 간략히 말해서 평소 잘 아는 건물의 뒷벽에 상상의  뒷문을 달아서 새 공간으로 가는 지름길을 낼 수도 있고, 건물 중앙에 상상의 계단을 내서 새로 만든 위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다.
 왜 머릿속에 이런 건축물을 세우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 지식의 총체를 형성하고 있는 무수한 관념 하나하나에 보관할 장소를 설정하기 위해서 이다. 리치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상 각각에 대해 이미지를 주어야한다고 한다.

' 먼 엤날, 서양에서 시모니더라는 귀족 시인이 친척과 친구와 함께 궁전에서 개최된 주연에 초대받았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시모니데스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바깥으로 나간 사이 갑자기 불어닥친 강풍으로 큰홀이 무너져 내렸다. 흥청대던 사람들은 모두 깔려 죽었고, 그들의 시체는 절단나고 서로 뒤섞여 가족들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시모니데스는 그의 친척과 친구들이 앉아 있던 순서를 정확히 생각해 내서, 한사람 한사람의 위치를 지적했기 때문에 어떤 시체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기억술이 탄생했고 후세에 전해지게 된것이다. '

아마란테라는 곳에 위치한 집이다. 이런집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출처 https://www.ivotavar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