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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1

20100111

이제 중국으로 돌아간 그녀가 꼭 4일째 되는 날이다.

어제는 메일로 짧은 글을 받았다.

"사촌 동생 줄 선물인데 가방하나만 사줘, 학교에 있는 언늬가 2월달에 중국으로 돌아온데."

메일은 휴대폰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불안하여 컴퓨터를 켠후 다시 확인해보았다.

'흠...가방이라...'

그리고 또 다시 온메일에는

"집에 돌아와서 느낀거지만, 내 친구랑 부모님들 선물을 많이 사지 못해서 아쉬워."

착하긴 착하다. 하지만 아직 생각이 너무 어린게 탈이기도 하지만....

항상 나에게 이야기 한다.

"제발 많이 먹고 살좀쩌, 같이 먹고 왜 나만 살찌는거야."

라는 그말이 오늘따라 그립구나...

청일전쟁과 만화

청일전쟁은 소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싸운 전쟁이다. 그리고 이전쟁은 주인공이 일본과 청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은 조선땅이었다. 1873년에 일어난 정한론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은 개국 이후 조선지배를 중요한 국가목표 중의 하나로 설정했따. 1876년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한 일본은 조선에서 강력한 경제적, 군사적 거점을 구축해 나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종주국으로 자임해 온 청나라와의 마찰은 불가피했다.
일본은 임오군란 (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조선을 확실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확신을 굳혔다. 당시 외상이었던 무쓰 무네미쓰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일 두 나라가 조선에서 어떻게 각자의 권력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점에 이르면 두 나라는 마치 물과 기름 같아서 도저히 공종할 수 없는 관계"였다. 청나라와 일본 두 나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병력을 강화하는 한편 전쟁을 일으킬 만한 적절한 명분을 축적해 나갔다.
1894년, 조선지배권을 둘러싼 일본과 청나라와의 전쟁을 촉발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친일개혁파의 지도급 인물인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과 청나라 모두를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청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한 동학농민군의 궐기였다. 반정부적이고 반외세적인 동학운동이 조선 남부 지역에서 크게 확대되자 청나라는 조선 조정의 요청에 따라 4천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맞서 일본도 출병을 결정하고 청나라군이 아산만에ㅅ 상륙하던 같은날 인천에 상륙해따.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서울로 진입해 경북궁을 점령하고 민씨 정권을 타도했다. 그리고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주도하에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친일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1984년 8월 1일 청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쟁은 선전포고가 있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쓰보이 고조 사령관이 이끄는 해군 제1유격대는 아산만 부근의 풍도에서 청나라 군함을 공격해 격침하고(7.25)아산을 점령했다(7.30). 또한 오토리 공사와 협력하여 흥선대원군 정권을 수립한 오시마 요시마사의 흔성여단은 성환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를 괴멸했다. 바다와 육지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일본은 드디어 8월 1일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고 전면전에 돌입해따. 전황은 청일전쟁과 시모노 세키조약의 설계자였던 무쓰도 놀랄 정도로 "일본군이 바다와 육지에서 연전연승"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아산전투에스 승리한 오시마의 혼성여단은 평양을 공략하고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가 남만주를 점령했다. 가바야마 스케노리가 총지휘한 해군은 황해해전에서 청나라가 자랑하는 북양함대를 격파했고 이어서 뤼순을 함락하고 마침내는 베이징에서 그리 멀지않은 웨이하이웨이 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평후열도를 장악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고,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일본은 거액의 전쟁보상금을 포함해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챙겼다.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일본인들은 이 전쟁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 단합된 국민적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서양 제국의 '포함외교'로 개국한 이래 진행된 20여년간의 서구화를 겪으면서 생긴 여러가지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욕구가 숨어있었다. 특히 열강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 앞에 굴복해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맹목적인 서구화 추종과 국수적인 일본주의사상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와의 전쟁은 그동안 쌓였던 굴욕과 번민을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였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이르는 과정과 전쟁 그자체를 문명담론으로 정당화했다. 문명의 경주에서 앞선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정의하고 있는 반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웃국가들을 문명의 경지로 이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일본은 문명이고, 청나라와 조선은 야만이라는 구도가 설정됐다.


임오군란의 발단

임오군란의 발단은 군인들이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일어난 폭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큰 정치적 변동을 야기했다. 당시 실세였던 명성황후가 장호원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고종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다시 정권은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민씨 세력을 척결하는 등 정치적 혁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주적 성격이 강한 흥성대원군의 집권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청나라는 친청파인 김윤식과 어윤중의 요청을 받아들여 속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3천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들은 일본군을 견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갔다.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 정권은 1개월만에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체제가 복구되면서 다시 명성황후가 실세로 등장했다.
그러나 조선 정국은 청나라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개혁을 주장하는 친일 세력들이 조선의 정국을 주도해 나갔고, 청나라 를 지지하는 친청 세력들은 권력의 핵심에서 서서히 밀려났다. 조선의 이러한 변화를 주도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던 청나라 실세인 이홍장이 반전을 시도했다. 그는 친일 세력과 가까운 고종을 적당히 제압하면서 정국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톈진에 유폐한 흥선대원군을 다시 조선에 돌려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세이난전쟁 西南戰爭

메이지 유신의 최대 공훈자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끈 사족士族의 반란. 정한파였던 그는 정한론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향인 가고시마로 낙향해 기회를 노리다가 1877년 메이지 정부를 상대로 봉기했따. 그러나 이 발란은 정부군에게 집압되었다.


대륙과 섬 사이의 조선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은 '은자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또는 '중국 저편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국제정세는 1882년 월리엄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코리아: 은자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에서 설파한 것처럼 조선을 더이상 은자의 나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영국이 중국대륙에 확실한 거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아편전쟁(1840~1842)이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서양의 세력은 더욱 거세졌고, '개국'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1840년대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면서 단단히 잠겨있던 조선의 문을 두드렸다. 조선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통해 서양과 본격적으로 접촉한 이후에도 "서양 오랑캐가 처들어올때 맞서 싸우지 않고 강화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는 파는것이다 라는 척화비를 적국에 세우면서 여전히 쇄국을 고집했다. 그러나 윤요호사건을 치르면서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개국 요구를 이겨내지 못하고 1876년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그 후 조선은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서양의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불행한 역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세기말 일본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흑선 네 척을 이끌고 1853년 도쿄만에 도착한 미국 동인함대의 매튜 페리Matthew C.Perry 사령관은 일본 지도자들에게 260여년 동안 지속된 도쿠가와 체제의 쇄국정책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이뤄진 일본의 개국은 곧 도쿠가와 바쿠한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일본의 젊은 사무라이들은 1868년 유신維新이라는 정치혁명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인 메이지체제를 탄생시켰다.
메이지 일본이 서구적 근대국가를 지향하면서 다룬 대외정책의 첫 의제는 조선문제였다. 조선 정벌을 당장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뒤로 미룰 것인지를 농의한 1873년의 정한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정한파와 비정한파의 치열한 논쟁은 세이난전쟁이라는 지도층 내부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으로 까지 이어졌다. 결국 정책 선택을 위한 이 투쟁은 비정한파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써 메이지정부는 조선 정벌보다는 부국강병을 위한 국내체제 정비와 근대화의 길로 매진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한의 의지와 정책이 완전 소멸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조선지배 정책을 점진적으로 실행하는 전략을 택한 것뿐이다.
조선은 일본에 개국 후 서양세력에게도 차례로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이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국가 목표로 설정하고 국력을 통한한 것과 달리 조선의 내부사정은 분열과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갈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암투,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로 분열된 지배층 등은 나라의 침로를 설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조선의 이런 혼란을 틈타 임오군란(1882), 청나라의 흥선대원군 납치(1882), 갑신정변(1884), 동학의 발흥(1892), 김옥균 암살(1893), 동학농민군의 봉기(1894) 등을 거치면서 조선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예부터 조선에서 종주국의 지위에 있었던 청나라와의 대립의 각을 세워나갔다. 다시 그리피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때의 조선은 "대륙의 거상과 섬의 역사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형세였다.

출처 -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 (한상일,한정선 지음)

도쿄퍽

지지신보의 만화를 주고나하면서 만화가로서 인정받은 기타자와 라쿠텐이 1905년 창간한 대형 컬러판 만화잡지이다. 일본시사 정치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쿄퍽은 기존의 만화잡지와 달리 컬러로 인쇄했으며, 가능한 한 글을 억제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도쿄퍽은 독자를 일본인에 한정하지 않고 만화에 일본어, 영어, 한문을 섞은 설명을 달아 영어 문화권과 한자 문화권 독자층까지 확보했다. 당시 인기를 누리고 있던 마루마루 진문이나 곳케이신문보다 훨씬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12년 폐간됐다.
출처-만화로 제국을 그리다 (한상일,한정선 지음) 일조각

지지신보 時事新報

만화의 효과를 일찍부터 간파하고 신문저널리즘에 이를 활용한 대표적인 인물은 지지신보를 창간한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메이지시대의 일본을 대표하는 제1의 계몽사상가로 평가받는 후쿠자와는 1882년 문명사업의 일환으로 이 신문을 창간했다. 지지신보는 근대 일본 저널리즘 발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신문은 당시 특정한 당파성 또는 정치성향을 뚜렷이 나타내면서 정부 또는 정당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대신문 주도의 언론계를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를 넘어서는 보다 독립된 신문을 지향했다. 이후 상업화되고 기업화되어 가던 많은 일간지가 불편부당을 내세우면서 신속한 보도 중심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립해 간것을 볼때, 지지신보가 이후 일본 저널리즘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란테라는 곳에 위치한 집이다. 이런집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출처 https://www.ivotavar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