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까지 조선은 '은자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또는 '중국 저편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국제정세는 1882년 월리엄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코리아: 은자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에서 설파한 것처럼 조선을 더이상 은자의 나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영국이 중국대륙에 확실한 거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아편전쟁(1840~1842)이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서양의 세력은 더욱 거세졌고, '개국'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1840년대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면서 단단히 잠겨있던 조선의 문을 두드렸다. 조선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통해 서양과 본격적으로 접촉한 이후에도 "서양 오랑캐가 처들어올때 맞서 싸우지 않고 강화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는 파는것이다 라는 척화비를 적국에 세우면서 여전히 쇄국을 고집했다. 그러나 윤요호사건을 치르면서 결국 조선은 일본의 개국 요구를 이겨내지 못하고 1876년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그 후 조선은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서양의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불행한 역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세기말 일본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흑선 네 척을 이끌고 1853년 도쿄만에 도착한 미국 동인함대의 매튜 페리Matthew C.Perry 사령관은 일본 지도자들에게 260여년 동안 지속된 도쿠가와 체제의 쇄국정책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이뤄진 일본의 개국은 곧 도쿠가와 바쿠한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일본의 젊은 사무라이들은 1868년 유신維新이라는 정치혁명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인 메이지체제를 탄생시켰다.
메이지 일본이 서구적 근대국가를 지향하면서 다룬 대외정책의 첫 의제는 조선문제였다. 조선 정벌을 당장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뒤로 미룰 것인지를 농의한 1873년의 정한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정한파와 비정한파의 치열한 논쟁은 세이난전쟁이라는 지도층 내부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으로 까지 이어졌다. 결국 정책 선택을 위한 이 투쟁은 비정한파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써 메이지정부는 조선 정벌보다는 부국강병을 위한 국내체제 정비와 근대화의 길로 매진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한의 의지와 정책이 완전 소멸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조선지배 정책을 점진적으로 실행하는 전략을 택한 것뿐이다.
조선은 일본에 개국 후 서양세력에게도 차례로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이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국가 목표로 설정하고 국력을 통한한 것과 달리 조선의 내부사정은 분열과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갈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암투,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로 분열된 지배층 등은 나라의 침로를 설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조선의 이런 혼란을 틈타 임오군란(1882), 청나라의 흥선대원군 납치(1882), 갑신정변(1884), 동학의 발흥(1892), 김옥균 암살(1893), 동학농민군의 봉기(1894) 등을 거치면서 조선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예부터 조선에서 종주국의 지위에 있었던 청나라와의 대립의 각을 세워나갔다. 다시 그리피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때의 조선은 "대륙의 거상과 섬의 역사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형세였다.
출처 -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 (한상일,한정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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